시원찮은 그녀를 위한 육성방법 6권 나스고원 이벤트
@mmm1288
第1話
【에리리】 설마…… 너.
에리리가 그 다음 말을 중얼거린 것은 약 십 초 동안 아무 말 없이 내 얼굴을 바라본 후였다.
하지만 그 십 초 동안 변하고만 에리리의 표정은 제대로 쳐다볼 수 없을 만큼 애처로웠다.
【에리리】작업을 내팽개치고 온 거야……?
【토모야】 올바른 판단이야.
그래서 나는 그 말을 입에 담고 말았다. 병에 걸려 힘들어하는 에리리에게, 치명적인 대미지를 주고 마는 그 주문을 말이다.
【에리리】너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아아아아아……, 아, 윽, 콜록, 윽!
그 목소리는 평소의 에리리의 높고 새된 목소리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낮고, 메말랐으며, 고통에 차 있어서,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말이 지닌 의미와 마음과 감정은 그 목소리보다 날카롭게 내 가슴에 꽂혔다.
【토모야】 너는 쓰러졌잖아? 인플루엔자에 걸렸잖아? 일주일은 안정을 취해야할 상황이라고.
【에리리】 하지만 그림은 완성했어! 마감 안에 끝냈다구!
【토모야】 긴급한 환자를 구하는 것과 게임 완성 중, 어느 쪽을 택해야 할지는 뻔하잖아.
【에리리】 그럼 양쪽 다 선택했어야지!
이오리와 같은 말 하지 마.
다른 녀석들과 같은 소리 하지 말라고.
너희들, 상식이 너무 부족하잖아.
【에리리】 지금 바로 돌아가. 토모야……. 윽, 콜록. 콜록. 으, 윽.
【토모야】 어이, 더는 말하지 마.
에리리는 구역질을 참듯 손으로 입을 막으며 기침한 후, 이번에는 천식 발작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거친 숨을 내쉬었다.
그런 상태에서도, 그녀는 말을 계속했다.
【에리리】 돌아가서, 게임을 완성해서, 납기해…….
【토모야】 이미 늦었어.
그렇다. 이미 늦었다. 설령 지금 바로 돌아가서, 이오리가 소개해준 업자에게 부탁하면 어떻게든 될지라도.
지금 내 마음속에는, 에리리를 버려두고 돌아간다는 선택지가 존재하지 않았다.
【에리리】 내 일주일을 헛되게 만들 거야? 우리 모두의 반년을 헛되게 만들 거야?!
【토모야】패키지판을 겨울 코믹마켓에 내놓지 못하는 것뿐이야……. 거의 다 완성됐으니까 언제 내놓더라도 딱히 다를 건 없어.
【에리리】 토모야 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나 정말 무슨 소리를 하는 걸까….
그럼 왜 우타하 선배를 지옥 밑바닥까지 몰아넣었지?
카토와 둘이서 며칠을 밤샘해가면서 디버그를 한 거지?
그야말로 모순 덩어리다.
하지만, 지금의 나에게는 그런 나날보다, 서클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있었다.
이 중요한 것은 꿈도 아닌, 상식적인 것도 아닌, 그저 내‥
【토모야】 큭, 지금 서클이, 게임이 신경 쓰일 리가 없잖아! 네가 쓰러져버렸는데.
서클을 위해서, 우리들의 게임을 위해서, 나의 꿈을 위해서 그림을 그리다가 쓰러져버렸는데…! 그런 게 신경 쓰일 리가 없잖아!
【에리리】 하지만, 모두의 게임이…! …
【토모야】 네가 그림을 그리다가 이렇게 쓰러질 바에는 차라리 예전처럼 나와 같이 소비형오타쿠로 있었으면 좋겠어. 네가 대단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
카시와기 에리가 아닌, 그저 내 에리리로서 있어줬으면 좋겠어!
그림을 그리면서 에리리가 고통 받고, 쓰러지는 것보다는 차라리 별 것도 아닌 걸 그리면서 좋다고 떠드는 옛날이 좋다.
같이 어깨를 맞대고 애니메이션을 시청하던 그 때가 좋다.
그리고 에리리가 대단해진다면, 에리리와 나의 사이는 자연스레 멀어질 것이다.
다시 8년 전처럼.. 되돌아가버릴 것이다.
나는.. 에리리와 다시 얘기할 수 없게 되어버릴 것이다.
【에리리】 …토모야?
【토모야】 사실 카토에게 너를 찾아가보라고 할 수 있었어. 나는 게임을 완성시킬 수 있었어.
그런데 왜 게임을 포기하면서까지 너를 직접 찾아왔겠냐고!
【토모야】 네가 게임보다, 서클보다 중요하다고! 소중하다고!
그 정도로 너를 중요하고 소중하게 여긴다고! 게임 따위가 너보다 중요할리가 없잖아!
【토모야】 에리리는…… 그냥 놔두면 금방 죽어버릴 것 같단 말이야…!
***
[미안해, 미안해. 토모 군…….]
[야, 약속, 지키지 못해서, 미안, 해.]
그것은 내가 처음으로 나스 고원에 있는 별장에 초대받았을 때 있었던 일이다.
나와 에리리는 이 저택에 머무르는 일주일 동안 별장에 가져온 게임기로 놀거나 녹화해둔 애니메이션이나 DVD를 보면서, 아침까지 밤까지 인도어(indoor)한 생활을 만끽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럴 예정이었던 것은 아니다.
모처럼 한 여름에 나스 고원에 가게 됐으니 벌레 사냥이나 등산, 강에서의 물놀이 등, 평소와는 달리 밖에서 놀 계획을 세우고,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이 날을 맞이했던 것이다.
……하지만, 출발 첫날 에리리가 고열로 쓰러지는 바람에 밖에 나가지 못하는 나날이 일주일 동안 계속되었을 뿐이다.
나는 그런 인도어한 리조트 생활을 [재미없다]고 생각할 틈도 없을 만큼 에리리를 걱정하며 울어댔다. 하지만 그녀와 함께 즐긴 애니메이션과 게임으로 그 괴로운 마음을 누그러뜨려, 최종적으로는 즐거운 추억으로 승화시켰다.
에리리와 아직 사이가 좋았던 시절에는 그런 이벤트가 자주 일어났다.
함께 풀장에서 논 다음날에 쓰러진 에리리를 일주일 동안 간병하거나,
운동회에 오지 못한 에리리에게, 참가상인 연필을 가져다주러 가거나,
딱히 별일 없는데도 열을 내며 쓰러진 에리리의 문병을 갔다 휴대용 게임으로 대전을 하기도 했다.
설에도, 크리스마스에도, 히나마츠리에도, 시치고산에도, 그녀가 아릅답게 치장한 차림보다 잠옷 차림만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기억을 더듬어 가보면 언제나 최종적으로는 미소를 짓고 있지만, 처음에는 가라앉을 대로 가라앉은 내가 존재했다.
차라리 나는 에리리 대신 건강한 내가 병에 걸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부터 아파하는 에리리를 보며 심각하게 가슴 졸이며 울먹거릴 만큼 걱정한 사람은 나뿐이었을지도 모른다.
자주 아픈 에리리를 태어난 순간부터 대해온 두 부모님과 본인은 나처럼 딱히 아픈 적이 없었던 인간보다 몸은 몰라도 마음이 강했던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몸이 튼튼했던 탓에 몸이 약한 에리리의 회복을 쉬이 믿지 못했다.
그 후로 8년 동안, 시간의 흐름에 맞춰 성장한 에리리와 보지 않으면서 오랫동안 살아왔다.
그래서 나는 지금의 에리리의 건강만큼은 신용하지 못했다.
또 쓰러지지 않을까, 쓰러지면 다시 일어서지 못하는 것 아닐까, 그냥 내버려둬도 될까, 내가 눈을 뗀 사이에 악화되는 것은 아닐까.
오랫동안 내버려뒀으면서, 딱히 책임지지도 못하면서 말이다.
그런데도, 나는 나 자신을 제어하지 못했다.
* * *
아까의 내 말 때문인지, 이 방에는 어색함이 흐르고, 쥐죽은 듯 아무소리도 나지 않았다.
에리리는 어색함을 피하듯 이불로 얼굴을 덮고 있었다.
그리고 내 마음을 털어놓은 말을 들은 에리리는 변했다.
【에리리】 ……
【토모야】 ……
【에리리】 …토‥토모야.
내 말로 인해 생긴 2분간의 정적을 에리리는 어색함을 무릅쓰고 깨뜨렸다.
【토모야】 …응?
【에리리】 진짜로‥ 게임을 포기할 거야‥?
【토모야】 ‥이제 늦었어. 그리고 게임을 내고 싶다면 여름코미케에 내도 돼.
발매일이 늦춰지는 정도로, 이 작품의 가치는 떨어지지 않아.
에리리에게 게임완성은 늦었다고 말했지만, 사실 이오리가 소개해준 업자에게 부탁한다면 게임을 완성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내게는 게임을 완성시키려고 도쿄에 다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저 지금은 에리리의 곁에 있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에리리】 하지만, 그 애(이즈미)를 이길 수 없어…. rouge en rouge를 이길 수 없어.
【토모야】 더는 싸울 필요 없어. 에리리.
【에리리】 하지만… 하지만…! 토모야에게 인정받지 못한 채로는…!
【토모야】 아니, 에리리. 네 그림… 정말 엄청나….
【에리리】 …‥뭐?
테이블 위에 놓인 용지를 한 장씩 바닥에 깔았다.
그것은 내가 에리리를 발견했을 때, 방 안에 흩어져 있던 원화…
아니, 이것은 원화가 아니라 회화다.
에리리는 우선 물감으로 이 원화를 그리고, 그것을 컬러 스캐너로 스캔한 후, PC로 이벤트 CG를 완성했다. 같은 수고를 두 번 들이는 데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나 같은 풋내기는 모른다. 아니, 아마 에리리 이외의 그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에리리의 선택은 옳았다.
그 사실은, 최종적으로 완성된 CG가 말해주고 있었다.
【토모야】 올해 본 그림 중에서… 최고의 그림이야.
【에리리】 으… 토모야.
이 방에 들어온 순간, 소름이 돋았다.
그것은 방안이 추웠기 때문도, 쓰러져 있는 에리리를 봤기 때문도 아니다.
바닥에 흩어져 있는 일곱장의 그림 때문이었다.
그것은 동인 작가 카시와기 에리가 지금까지 그렸던 그림이 아니었다.
미술부 부원 사와무라 스펜서 에리리가, 지금까지 그렸던 그림도 아니었다.
지금까지와는 터치가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카시와기 에리의 팬이나 모에만 밝히는 오타쿠들이 받아들이지 못할 것 같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 점에 있어서도 빈틈이 없었다.
원래의 터치가 남아 있으며, 그려진 여자애는 놀라울 정도로 귀여웠다.
리얼하고, 모에하며, 예술적인 그림이다.
대체 어떻게 이런 요소를 융합시킨 것인지, 나 같은 풋내기는, 아니, 아마 에리리 이외의 인간은 전혀 이해하지 못할 테고, 재현하지도 못할 것이다.
【에리리】 그, 그럼…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
【토모야】 ……응.
【에리리】 내 그림이, 그 애의 그림보다, 엄청나…?
【토모야】 응.
【에리리】 윽, 아, 아하, 아하…, 흐윽.
미안해, 이즈미… 하지만 방금은 에리리를 위해 선의의 거짓말을 한 게 아냐.
정말로 에리리의 작품은 대단했어.
내 안의 『좋아하는 그림쟁이 랭킹』이 진짜로 변해버렸어.
【에리리】 아하하하하… . 으, 으, 우아아…. 해냈어, 해냈어…. 이겼다구.
나의 주저 없는 대답을 들은 에리리는 기뻐했다.
하지만, 코를 훌쩍이고, 목이 쉬었으며, 때때로 기침을 하면서 기뻐하는 모습은 마치 어린 아이를 보는 것 같았다.
【에리리】 하시마 이즈미에게, 효도 미치루에게.... 카스미가오카 우타하에게, 이겼어…!
【토모야】 그런 소리는 안 했어, 이 바보야.
그녀가 느끼고 있는 감정은, 제멋대로라는 생각이 들 만큼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나한테 칭찬을 들었다고 울 정도로 기뻐하지 말라고. 이 바보야.
하지만, 이건 거짓말이 아냐, 에리리.
네 그림, 정말 엄청나.
두근거렸어. 소름이 끼쳤다고.
하지만, 아니, 그렇기 때문에…
[무슨 일이 있어도 팔아주고 싶다 는 것]과는 정반대되는 감정이 샘솟았어.
***
이 집에 도착하고, 쓰러진 에리리를 침대에 옮기고, 이오리 일행을 배웅하고, 왕진 온 의사를 맞이한 후, 겨우 한 숨 돌릴 수 있게 된 오전 두 시 즈음부터 에리리가 눈 뜰 때까지의 세 시간.
발버둥 칠 시간이 아직 있었는데, 게임을 완성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는데….
그런데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할 수 없었다.
방 안에 흩어져 있는 에리리의 밑그림을 쳐다보기만 했다.
PC 안에 남아있는 완성판 CG를 바라보기만 했다.
나에게 있어서는 3분도 되지 않는 듯한 세 시간 동안……
나 자신도 알 수 없는 수많은 감정이 소용돌이치며, 내 제어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그 중 하나는 틀림없는 감동.
상상을 아득히 뛰어넘는 엄청난 그림이, 에리리의 방에 놓여 있었다.
처음 이 방의 문이 열린 순간 받은 충격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계속 봉인되어 있던 보물 상자를 드디어 연 듯한 착각에 빠진 나는, 만약 이오리나
에나카 씨가 그 자리에 없었다면 감동의 함성을 내질렀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아마도 감개.
그 그림에는 에리리가 태어난 후부터의 16년과 9개월이…
작가가 되기로 결심한 후부터의 8년이 응축되어 있었다.
예전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자신을 궁지에 몰아넣고, 피를 토하면서.
그렇게까지 해서 에리리가 손에 넣은 것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객관적으로도, 그리고 주관적으로도 알게 되었기에, 눈물이 멎지 않았다.
다른 하나는 역시 감사.
서클을 위해, 동료를 위해, 우리의 목표를 위해…
그리고 어쩌면 내 꿈을 위해, 사력을 다해 그림을 그려준 것이다.
제멋대로인 에리리가, 본성을 숨기고 사는 에리리가, 거짓말쟁이인 에리리가.
지금까지의 에리리와는 다른, 과거의 에리리가 반갑고 기뻐서 참을 수 없었다.
다른 하나는, 역시 동경.
우타하 선배, 미치루, 이즈미에게 느꼈던 감정을, 드디어 에리리에게서도 느끼게 되었다.
이대로 있으면, 에리리는 가버리고 만다.
내가 동경해야만 할, 엄청난 크리에이터가 되고 만다.
나를 두고 가버릴 것이다…….
아니, 잠깐만… 그만해, 나.
더는, 말하지 마.
더는, 본심을, 말하지 마….
어이, 어째서야?
왜 내가 에리리의 그림 따위를 포교해야만 하는 건데?
어째서, 내 졸개가 그린 그림을 엄청나다고 인정해야만 하는 거야?
이 녀석은 실은 대단한 녀석이 아니라고.
내 졸개에, 나 외에는 친구가 없고, 툭하면 울고, 언제나 내 뒤를 따라오기만 하던 겁쟁이야.
병치레가 잦고,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별로 없는데다, 어렸을 적에 그린 그림은 엉망진창이었다고.
나와 부모님의 영향으로 오타쿠가 되었을 뿐인, 주체성 없는 녀석이야.
그러니까, 나만큼은 이 녀석을 인정해서는 안 되었다.
나에게 있어서의 넘버 원 크리에이터 자리는 사와무라 스펜서 에리리에게만은 줘선 안 된다.
이 녀석이 내 넘버 원 크리에이터가 된다면.
그것은 즉, 그 녀석과 내가 멀어지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더 이상 내 졸개가 아니게 된다고….
정말, 정말, 수많은 감정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하나는 열등감.
하나는 소외감.
그리고 하나는, 고독.
[너는 실력이 없어!]
[내가 아는 것은 네가 실력이 없다는 것뿐이야. 엄청나지 않다는 것뿐이라고!]
여름, 불꽃놀이 대회 날 밤에, 에리리에게 한 말은.
질타도, 격려도 아닌, 단순한 소망이었다.
전부, 거짓말이었던 것이다.
그것도 그럴 것이, 내가 좋아했던 것은 에리리의 그림도, 재능도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격렬하게 에리리의 성장을 부추겼던 나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그것을 바라고 있지 않았다…….
왜냐하면, 내가 좋아했던 에리리는…
* * *
【토모야】 뭐랄까, 전개가 흐트러지는 느낌이라 미묘하네. 코미디인지 시리어스인지 모르겠어.
【에리리】 뭐, 이게 이 감독의 스타일이야. 작품에 제대로 빠지면 완전 변해버리는데 말이야.
【토모야】 …어느새 해가 떴네.
【에리리】 오늘은 날씨가 맑네. 지난 주말은 비와 눈이 번갈아 와서 어두침침했는데 말이야.
【토모야】 뭐, 날씨가 맑아도 우리는 집에서 애니메이션이나 보고 있지만 말이야.
【토모야】 그런데 다음에는 뭐볼까? 지난 주 방송분은 거의 다 봤잖아.
【에리리】 …‥저기, 오랜만에 [그 눈] 보지 않을래?
【토모야】 그 눈의 프리즘 말이지? 나, 처음부터 끝까지 세 번은 봤는데…. 뭐, 몇 번 봐도 눈물 날 만큼 재미있기는 하지만 말이야.
【에리리】 나, 실은 아직 7화까지만 봤어. 지금 안 보면 평생 최종화를 보지 않을 것 같아.
【토모야】 에로 동인지를 두 권이나 냈으면서 끝까지 안 본 거냐….
【에리리】 그게 말이야, 이미 제철을 지나버렸잖아? 그래서 그런지 이번 분기의 작품을 우선하게 되어 버리더라구.
【토모야】 하아, 작품의 인기에 편승하기만 하는 동인 작가는 정말…‥.
해뜨기 전… 에리리는 한동안 울면서 웃어댄 후, 갑자기 조용해졌다.
그 후, 약을 먹은 그녀는 이불을 덮고 바로 잠들어버렸다.
그대로 다섯 시간 가량 잠을 잔 후, 느긋하게 일어난 그녀는 느릿느릿 텔레비전 전원을 켰다.
그때부터 우리는 겨울 코믹마켓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게 됐다.
【토모야】 그런데 말이야.
【에리리】 응?
【토모야】 지금, 몇 시야?
【에리리】 1시, 15분.
【토모야】 …‥그렇구나.
…드디어, 이오리가 마련해준 타임 리미트까지도 지나버린, 완전 아웃 시간이 되어 있었다.
더는 되돌릴 수 없다. 끝나버렸다.
* * *
그리고 오후 여섯 시…
결국 월요일 낮은 애니메이션을 스무 편정도 보면서 보냈다.
정말 이렇게 나태하게 평일을 보내는 건 대체 얼마만일까.
【에리리】 토모야, 너 요리 해본 적 있어?
【토모야】 너보다는 요리할 기회가 많았을 거라고 단언할 수 있어…. 그러니까 방에 돌아가서 쉬고 있어.
에리리의 체온은 38도 이상 되지만, 그래도 겨우 “배고파”라는 말을 할 수 있을 만큼 회복된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저녁을 만들기 위해 주방으로 이동했다. …에리리도 함께.
【에리리】 그래도 네가 어떤 살인 요리를 만들지 신경 쓰인단 말이야.
【토모야】 평소의 에리리라면 몰라도, 환자한테 그딴 걸 먹일 수는 없잖아.
【에리리】 ‥평소라면 살인 요리를 했을 거란 거야?
【토모야】 ….
【에리리】 ‥역시 불안해. 먹을 거라면 내가 사둔 게 아직 잔뜩 있으니까 그걸…
【토모야】 좀 전에 봤는데 전부 컵라면이랑 돼지 뼈 라면뿐이었다고!
자기는 닭껍질이면서…. 같은 생각을 하더라도 결코 입 밖으로 말해서는 안 된다.
그런고로 닭껍질 치킨본(chicken bone) 에리리는 감기에 걸렸으면서도 내 등 뒤에 서서 내 손을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아무리 “부엌은 추워.”라고 말해도.
“자, 이제 안 추워.”라고 말하면서 잠옷 위에 운동복을 입더니, 그 위에 솜이 든 잠옷까지 걸쳤다. 그리고 내 곁을… 아니, 이 자리를 떠나려고 하지 않았다.
【에리리】 그런데, 뭘 만들 거야?
【토모야】 죽, 어려운 걸 만들다 실패하는 것보단 낫잖아.
어제 이오리가 사온 물건들 중에 진공 포장된 밥이 가득 들어있는 것을 보고는, 그 녀석의 철저하기 그지없는 준비성 때문에 살짝 질리고 말았다.
【에리리】 하지만 채소가 없는데?
【토모야】 인스턴트 수프가 있으니까 그걸로 때울 거야.
【에리리】 아, 그럼 파스타 소스를 넣는 건 어때? 자, 저기 나폴리탄 소스가 있어!
【토모야】 …하다못해 봉골레 같은 걸 먹어.
전부터 생각했던 거지만, 이 녀석의 식성은 남자에 가깝다니까….
* * *
【에리리】 휴우…‥. 이제 됐어.
【토모야】 뭐야, 벌써 잘 먹었습니다, 야?
부엌에서 30분 넘게 격투를 벌인 끝에 완성한 내 피와 땀과 눈물의 결정(실제 주성분: 쌀, 콩소메 채소 수프)을 에리리는 겨우 세 숟가락 정도 먹고 말았다.
그릇을 보니 그 안에는 죽이 아직 반 정도, 아니 8할 정도 남아 있었다.
【에리리】 [잘 먹었습니다, 야?]는 무슨…‥ 애 취급하는 거야?
【토모야】 그야 남이 성의를 담아 만든 음식을 남기는 녀석은 애잖아.
【에리리】 하지만 맛없단 말이야.
역시 몸 상태가 좋지 않은 탓에 입맛도 없는 듯한 에리리는 아무리 맛있는 음식일지라도 잘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다. 내가 만든 요리 자체의 완성도는 관계없다. 틀림없다.
【토모야】 영양 섭취를 해야 낫는다고. 그러니까 먹어.
【에리리】 무리야.
【토모야】 그래도 먹어.
【에리리】 싫어.
【토모야】 그러니까 닭껍질… 아니, 됐어.
기름진 걸 좋아하면서도 입이 정말 짧다니깐…‥.
게다가 은둔형 외톨이라서 운동도 전혀 안 하잖아. 이 녀석, 나중에 성인병으로 정말 고생할 거야.
잠깐, 지금의 나는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저 녀석 아빠 같잖아.
에리리와 병이라는, 어릴 적부터 익숙했던 키워드가 악마합체를 한 탓에 지금까지 잠들어 있었던 8년보다 더 전의 내가 현재의 나를 밀쳐내고 의식을 지배한 것 같은 묘한 감각이 나를 괴롭히고 있다고나 할까, 내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다고나 할까…‥.
【에리리】 그렇게 나한테 이걸 먹이고 싶은 거야?
【토모야】 너를 생각해서 하는 말이야.
【에리리】 …‥그, 그렇다면, 조건여하에 따라 먹어줄 수도 있어.
그런 나에게 물들었는지, 침대에 앉은 에리리가 마치 딸 같은 태도로 나를 올려다보면서 말했다.
【토모야】 그 조건이 뭔데?
【에리리】 으음, 그러니까…….
태도만이 아니라, 말투도 딸 같았다.
【에리리】 네, 네, 네…‥ 네가 먹여준다면, 저기, 먹어줄 수도….
【토모야】 좋아, 아~
【에리리】 ……
에리리가 그 조건을 끝까지 밝히기도 전에, 나는 그녀에게서 죽이 든 그릇과 숟가락을 빼앗았다. 그리고 죽을 퍼서 그녀를 향해 내밀었다.
【토모야】 왜 그래? 바라는 대로 해주잖아. 안 먹을 거야?
【에리리】 뭐, 뭐….
내가 그 조건을 즉시 받아들이자, 말을 꺼낸 이가 예상도 못한 듯 당황하고 말았다.
자신의 눈앞에 있는 숟가락과 나를 번갈아 바라본 후, 무릎 위에 놓인 양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더니….
【에리리】 너, 너 열이라도 있는 거 아냐?!
【토모야】 열이 있는 건 내가 아니라 너잖아.
【에리리】 그, 그, 그런 말도 안 되는 농담을 진담으로 받아들이고…!
아, 아~ 같은 소리나 하다니, 무슨 생각 하는 거야?! 바보 아냐?!
그런 건 그렇다쳐도, 당황했을 때의 태도와 말투와 대사가 전형적인 츤데레 느낌이 되는 것 좀 어떻게 해. 에리리.
【토모야】 농담이든 진담이든, 네가 죽을 먹기만 한다면 나는 뭐든지 하겠어.
【에리리】 뭐, 뭣…!
그리고 에리리가 당황하면 할수록, 나는 반드시 마음이 진정되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지금은 부끄러워할 때가 아니다. 투덜댈 때가 아니다.
지금, 에리리를 지킬 사람은 나뿐이니까.
【토모야】 나중에 바보 취급해도 돼. 놀리고 싶으면 얼마든지 놀려. 그러니까 지금은 이걸 먹어.
【에리리】 왜, 그렇게 진지한 거야…….
【토모야】 자, 아~.
【에리리】 …‥토, 토모야….
【토모야】 아~.
아무리 화내도, 부정해도, 사태가 변하지 않자, 에리리는 점점 당황하면서 부끄러워하기 시작하더니, 우물쭈물 거렸다….
그리고 천천히 숨을 내뱉으면서 각오를 다지더니……
【에리리】 …하읍.
내가 내민 숟가락을 입에 넣었다.
나를 향해 얼굴을 한껏 내밀면서,
어린애처럼 한심한 꼴로 말이다.
【토모야】 …‥맛있어?
【에리리】 맛없다고 몇 번이나 말했잖아.
【토모야】 그랬지, 자.
【에리리】 냠.
역시 맛에 있어서는 부정적인 의견을 굽히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녀는 내가 퍼주는 죽을 또 먹었다.
타이밍을 읽은 나는 그녀의 입가를 향해 숟가락을 내밀었다.
【토모야】 맛없어도 참아.
【에리리】 응. 또 줘.
【토모야】 …‥그리고 너무 급하게 먹지 마. 꼭꼭 씹어 먹어.
마치 딸을 가르치는 아빠 같잖아‥.
입안의 죽을 제대로 씹지도 않고 삼킨 듯한 에리리는 먹이를 달라고 조르는 새끼 새처럼 내 숟가락을 기다렸다.
【에리리】 으음…읍?! 콜록, 콜록.
【토모야】 그러니까 급하게 먹지 말라고 했잖아….
그리고 몇 분 후, 에리리는 죽을 다 먹었다.
…‥자신의 몫뿐만 아니라, 내 몫까지 전부 말이다.
사실은 죽이 맛있었는데 맛없다고 한 거였을까? 아니면, 내가 먹여줘서… 아, 응.
더 이상 생각하지 말기로 하자.
* * *
화요일, 오전 아홉 시.
내가 나스 고원에 와서 두 번째 맞이한 밤의 장막이 걷혔다.
동쪽 하늘에서 쏟아지는 햇빛이 창문과 눈꺼풀을 통과한 후, 나에게 쏟아졌다.
이런 전형적인 아침햇살을 맞는 것이 대체 얼마만일까.
평일 아침, 이부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아도 되는 쾌감, 이것이 감기에 걸렸을 때의 묘미다.
하지만 이런 최악의 몸 상태로 방에 홀로 누워있다면, 이렇게 느긋한 마음이 들지 않을 것이다.
이런 기분을 즐길 수 있는 것은, 곁에서 누군가가 나를 도움이 되든, 되지 않든, ‘있어만 줘도 좋아.’ 싶은 녀석이 옆에 있다는 그런 평범한 사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초등학생 때, 지금의 우리와는 천지가 정반대였던 날, 그때의 에리리도 지금의 나와 같은 마음이었을까…….
* * *
【에리리】 토모야~. 아침밥 다 됐어~.
【토모야】 …필요 없어.
어제 또 왕진 온 의사는 우리에게 좋은 보고와 나쁜 보고를 해줬다.
좋은 보고는 에리리가 실은 인플루엔자가 아니라 단순한 감기에 걸렸다는 것이다.
몸 상태도 꽤 좋아졌고 열도 내렸으니 2~3일 안에 거의 완치될 것이라고 의사는 말했다.
【에리리】 뭐~. 환자니까 잔말 말고 먹으라고 말했던 건 어디 사는 누구였더라?
【토모야】 나 지금 진짜로 식욕 없으니까 좀 봐줘‥.
그리고 나쁜 쪽은 누군가 씨가 그 [단순한 감기]를 나에게 옮긴 탓에, 나는 그 누군가 씨보다 훨씬 몸 상태가 나빠졌다는 점이다.
인플루엔자에 걸린 걸지도 모르는 환자와 하루 종일 한 방에 같이 있는 것은 자살행위라면서 의사에게 꾸짖음까지 들었다…….
【에리리】 나도 어제는 식욕이 없었어. 그러니까 토모야만 도망치는 건 허락할 수 없어.
【토모야】 어제 식욕이 없었는데 내 죽을 다 먹은 거야?
【에리리】 ……
【토모야】 ……
【에리리】 그, 그건 내, 내 건강을 위해서 먹은 거니까! 그래서 지금 이렇게 움직일 수 있구!
【토모야】 아, 그래?
나는 “매일 정크푸드만 먹는 녀석이… 정말이야?” 라고 물으며 추궁할려 했지만‥ 그만두었다.
에리리는 정말로 자기의 건강을 위해서 먹은 걸까? 아니면 내가 먹여..
앗차, 이 건에 대해서는 다시 생각하지 말기로 하자.
【토모야】 근데 에리리. 그래도 그렇지 아침부터 라면을 어떻게 먹어?! 분명 토할 거라고!
【에리리】 자아~. 후후 불어서 식혀줄게, 토모야~. 아하하하하.
그런 고로, 하룻밤 자고 조금은 기운을 되찾은 에리리는 완전히 쓰러져 버린 내 옆에서 촐싹거리고 있었다.
체온계로 잰 내 체온이 38도 이상이라는 것을 알고 설교를 잔뜩 늘어놓더니, 일어나려고 하는 나를 말리며 자기가 아침을 준비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힘차게…‥ 물을 끓이더니 컵라면 뚜껑을 뜯었다.
…‥뭐, 요리를 하려다 대참사를 일으키는 것보다는 나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좀 자기 주제를 너무 아는 거 아닌가 싶었다.
【에리리】 아~ 맛있어~. 잔뜩 들어간 염분이 자아내는 이 짠맛이 위에 스며들어~.
【토모야】 너야말로 완전히 낫지도 않은 몸으로 그런 걸 잘도 먹는구나.
【에리리】 실은 여기에 온 후로 하루에 한 끼밖에 안 먹었거든. 그래서 몸 상태가 좀 좋아지니 배가 엄청 고파.
【토모야】 그러니까 쓰러진 거야. 이 바보야.
에리리는 내 불평을 들은 척도 하지 않으면서 후루룩 소리를 내며 라면을 먹었다.
【에리리】 이 적당히 단단하고 얇은 면발의 목 넘김은 최고야! 이 시리즈 엄청 좋아하는데 도쿄에서는 팔지 않더라구. 그래서 이 근처에 와서 눈에 띄기만 하면 사재기를 했어.
【토모야】 …‥저기, 우동이나 메밀국수 같은 건 없어?
식욕 없는 사람 앞에서 그렇게 맛있게 먹어대다니, 너무하잖아. 젠장.
【에리리】 이거 다 먹고 나서 냄비 볶음 우동 만들어줄게. 볶기만 하면 되는 녀석 말이야.
【토모야】 하다못해 달걀이라도…‥.
【에리리】 알았으니까 만들어올 때까지 자고 있어. 다 되면 깨워줄게.
【토모야】 …아니, 나도 갈게.
【에리리】 으, 응? 아니, 토모야는 환자구…. 나는 다 나았으니까 나 혼자서‥ 아니, 뭐, 뭐‥ 굳이 오겠다면 어쩔 수 없지만‥.
【토모야】 어느 쪽인 거냐고….
에리리가 내가 요리할 때 쫄랑쫄랑 쫓아온 것처럼 나도 에리리를 따라가기로 했다.
이 녀석, 볶는 요리도 못할 것 같단 말이지‥. 다 태워버릴 것 같고.
그리고 뭐, 지금은 에리리랑 떨어지고 싶지 않아서 이기도 해.
【에리리】 토모야, 부엌은 추우니까 이거라도 입어.
에리리는 나스 고원에 와서 자신이 매일 일을 했었던 의자에 걸쳐져있는 옷을 집어 나에게 주었다.
【토모야】 …에리리. 이거, 네 옷‥.
【에리리】 이, 입기 싫으면 입지 말던가….
에리리가 내게 준 옷은 에리리의 체육복이었다.
내 집에 올 때 입고 오는 초록색 바탕의 옷에 흰 선 세 개가 나있는 그 옷이었다.
【토모야】 …‥
나는 아무소리하지 않고 에리리의 체육복을 입었다.
밖이 추워서 어쩔 수 없이 입는 거지, 절대 에리리의 옷을 입어보고 싶어서 입는 건 아니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 * *
【에리리】 토모야. 그럼 내가 요리를 다 할 때까지 이 의자에 앉아 있어.
【토모야】 응.
에리리는 나를 식탁의자에 앉히고는, 부엌작업대로 가 냄비 볶음 우동의 포장을 뜯고 냄비를 가열시켰다.
【토모야】 그런데 에리리. 네 체육복 말이야.
【에리리】 왜, 왜?! 무슨 이상한 냄새라도 나?!
【토모야】 아니, 그냥 좀 작다고 말하려고 한 건데… 웬 딴 소리야?
【에리리】 아… 아, 그 소리구나. 나는 또‥ 아하하‥. 그런데 당연히 여자 옷이 남자한테
맞을 리가 없잖아. 왜 그런 당연한 걸 물어보는 거야?!
【토모야】 물어보는 것도 안 되는 거냐….
에리리가 왜 냄새에 관해서 언급했는지 이해는 갔다.
에리리의 체육복에서는 밤새 그림을 그리고, 어제 밤 쓰러진 후 계속 이 옷을 입은 채 누워있었기 때문에 냄새가 나기는 했다. 하나는 바디워시의 냄새, 또 하나는 에리리의 체취‥.
나는 냄새를 절대 일부로 맡지 않았다. 냄새가 났으니까 맡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 * *
【에리리】 자, 다 됐어. 먹어.
【토모야】 아, 그럼. 감사히‥.
나는 에리리가 만들어 준 볶음 우동을 다섯 젓가락 정도 먹고 먹기를 그만두었다.
【에리리】 뭐야, 왜 안 먹는 거야? 남이 기껏 만들어 준 요리를 다 먹지 않고?
【토모야】 그러니까, 지금은 입맛이‥
【에리리】 남이 성의를 담아 만든 음식을 남기는 토모야는 애네. 아하하.
【토모야】 으윽, 알았어. 알았다고. 다 먹으면 되는 거잖아.
나는 결국 볶음 우동을 다 먹어버렸다. 입맛이 없는데 억지로 먹는 느낌은 마치 음식을 먹을 대로 먹어서 배가 꽉 찬 상태에서 또 다른 음식을 먹을 때의 느낌과 같았다.
【에리리】 맛있었어?
에리리는 천진난만한 미소로 웃으며 말했다.
【토모야】 입맛이 없다는데 맛있을 리가 있겠냐고.
그 우동은 당연히 맛이 없었지만, 그래도 나는 그것을 다 먹었다.
애라고 놀림 받지 않으려고, 만든 사람을 위해서도.
* * *
【에리리】 저기, 선물은 뭘로 할까? 토모야가 골라 봐.
【토모야】 그런 건 네가 고르면 되잖아.
【에리리】 안 돼, 네가 골라줘야만 의미가 있단 말이야.
그리고 그 후로 며칠이 더 지났다.
에리리의 열도 완전히 내려갔고, 그에 따라 나도 건강을 되찾아갔다.
그런 식으로 우리는 누가 먼저 다 낫는지 경쟁했다.
【에리리】 왜냐하면…… 모처럼의, 크리스마스 선물이잖아.
그렇다. 그리고 오늘은 12월 중에서도 가장 기념비적인 날이다.
마을 곳곳에서 들려오는 흥겨운 음악.
번화가 한가운데에 설치된, 조명이 달린 거대한 트리.
그리고 크리스마스를 맞이한 상점가를 돌아다니는 커플들.
……그 중 한 커플은 수상쩍은 노점에서 액세서리를 고르느라 고생하고 있었다.
【토모야】 그, 그럼…‥ 나는 이 빨간색 브로치로 하겠어!
【에리리】 에이~. 바로 밑에 반지가 있는데 그걸 고르는 거야? 정말 주변머리 없는 겁쟁이라니깐.
【토모야】 네가 하도 성화라서 고민 끝에 고른 사람을 그렇게 매도해야 되겠냐?!
【에리리】 그치만~ 이렇게 호감도 올려놓고 그런 무난한 선택지를 고르는 사람이 어디있냐구.
【토모야】 어, 뭐야? 진짜로 내가 선택 미스를 한 거야?
【에리리】 브로치는 호감도만 1 올라가고 이벤트 CG도 안 나와. 차라리 코 피어스를 골라서 리액션을 즐기는 편이 나아…. 공략은 포기해야겠지만 말이야.
【토모야】 으음~ 그건 그렇고 세르비스는 생각했던 것보다 느끼한 녀석이네.
【에리리】 …‥세르비스를 디스하면 설령 토모야라도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야.
【토모야】 너, 지금 눈빛이 진짜 진지하거든?!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말라고!
그렇다. 어느 액세서리를 고를지 고민하고 있는 이는 주인공인 에리(명칭 변경 가능), 그리고 그녀의 소꿉친구인 세르비스 커플이다.
[리틀러브*랩소디], 3년차 크리스마스 이벤트는 이렇게 내 선택 미스 탓에 재미없게 끝나고 말았다.
【토모야】 하지만 세르비스는 여름의 불꽃놀이 이벤트가 클라이맥스라서 그런지, 겨울 이벤트에는 확 와 닿지 않네.
【에리리】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무슨 소리 하는 거냐구, 토모야! 이건 유저가 망상하기 쉽도록 일부러 인상에 남지 않는 이벤트로 만든 거라구! 동인으로 보완해서 처리하란 거란 말이야!
【토모야】 그러니까 너는 세르비스와 관련된 일이면 캐릭터가 변해버려서 무섭다고….
볼 만한 애니메이션이 다 떨어져서 심심해진 에리리는 풍부한 재력을 구사해서 아마X프라X에서 세 대째 PX3을 구입했다.
그리고 같이 최신 게임이라도 구입했나 했더니, 인터넷을 연결해 게임 아X러브로 고전게임을 하나 다운했다.
그것은 바로 [리틀러브*랩소디]…‥.
우리에게 있어 시작이자 끝, 그리고 절교의 계기.
과거, 에리리가 처음으로 나에게 선물해준 여성향 게임.
<BGM: 09_2>
【에리리】 그건 그렇고, 우리는 결국 전에 함께 왔을 때랑 달라진 게 없네.
【토모야】 그래.
【에리리】 하루 종일 집밖으로 나가지도 않고, 애니메이션 보고, 게임이나 하고…….
【토모야】 감기에 걸렸으니까 어쩔 수 없잖아. 그때도, 그리고 이번에도 말이야.
내 옆에 앉아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에리리가 웃음을 터뜨렸다.
일전에 함께 왔을 때와 변함없는, 순진무구한 에리리인 채로 말이다.
【에리리】 하지만, 이제 우리 둘 다 다 나았어.
【토모야】 응.
아니, 다르다.
우리는 그 시절의 우리처럼 순진무구할 수 없다.
【에리리】 ……내일은, 돌아가자.
【토모야】 ……응.
지금의 우리에게는, 언제까지나 끝나지 않는 여름방학도, 영원히 반복되는 겨울방학도 없다.
슬슬, 현실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에리리】 나, 돌아가면 모두에게 사과할 거야.
【토모야】 ……그래.
그래서 에리리는 오늘, 우리에게 있어 마지막 휴일에, 이 [리틀러브*랩소디]를 플레이하기로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타이틀을 고른 것에는, 분명, 커다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에리리】 메구미에게, 효도 양에게, 그리고…… 카스미가오카 우타하에게도, 사과할 거야.
【토모야】 나도 같이 사과할게. 그러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
【에리리】 아니, 나 혼자 사과할래.
【토모야】 에리리…….
실은 내 탓이기도 한데, 내 탓인데.
나에게, 그 어떤 트러블도 돈과 정치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주변머리가 있었다면.
나에게, 힘 있는 누군가에게 기댈 수 있을 정도로 머릿속이 유연했다면.
나에게, 질투심이나 독점욕을 가지지 않을 만큼, 강한 마음이 있었다면…….
【에리리】 그렇지만, 태어나서 처음으로 마감을 지키지 못한 건…… 퀄리티를 추구한 나머지, 모두의 목표를 산산조각내고 만 건…….
하지만 에리리는 그런 내 후회는 안중에 없다는 듯이, 편안한 표정으로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에리리】 내 죄이자, 내 책임이자…… 그리고, 내 긍지야.
그 말은 화면 안에 있는 왕녀 에리가 말한 것처럼, 화면 밖에 있는 나에게 전해졌다.
【에리리】 ……이런 식으로 말하면 다들 질려버릴지도 모르지만 말이야.
실은, 내가 에리리의 뺨을 때리고, 그리고 내가 모두에게 뺨을 맞아야만 하는데.
하지만, 화면 안에 있는 에리리는 내 개입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저, 나를 마음의 버팀목으로 삼을 뿐이다.
<BGM: 09_2의 하이라이트 부분 1분 27초 시작>
【에리리】 미안해, 토모야.
에리리가 콘트롤러를 쥔 내 손과 자신을 손을 포갰다.
내 어깨에 자신의 머리를 살며시 얹는 것과 동시에 말이다.
【에리리】 미안해…….
그 사과가, 무엇을, 언제까지를 가리키고 있는지, 나는 알지 못했다.
그리고 아마 에리리도 답을 밝히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나도 나 자신의 말로 답하지 않았다.
그저 컨트롤러의 버튼을 눌러, 세르비스의 마지막 대사를 촉구했다.
[메리크리스마스, 에리.]
[메리크리스마스, 세르비스.]
세르비스의 대사와 동시에 나는 에리리를 한 팔로 안아주었다.
그런, 크리스마스 이벤트의 종료와 함께…….
게임 속의, 그리고 현실의 성스러운 날에, 우리는, 8년 만에 화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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